
오늘은 대전으로 주소지를 고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컴퓨터로 신청할까도 생각은 했지만
오늘따라 그냥 걷고 싶어서
헬스장 다녀오면서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 빠르게 처리하고
잠깐 의자에서 민증에 주소지 스티커를 붙이려는데,
문득 민증 구석의 오래된 스티커의 동그란 흔적이 보였다.
색이 다 빠져서 자세히 봐야만 보이는 그 동그라미는
스무 살 때 학교에서 신청했던 조혈모세포 기증 동의 스티커였다.
나는 잠시 예전 생각이 났다.
2013년, 대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한창 추웠던 3월 쯤이었나?
학교 안 공터에 조혈모세포 부스가 열려있었다.
수업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새로 사귄 친구가 그 부스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앉아있기에 '뭐해?'라고 한마디 물어보았다가 나도 얼떨결에 앉게 되었다.
조혈모세포 기증 동의서라고 했다.
보니까 피 뽑는 건 좀 무서웠지만 좋은 일인 것 같아서 동의서에 동그라미를 쳤다.
민증의 동그란 스티커는 그때 받아서 붙인 거였다.
그러고 열심히 지내다 보니 잊어버렸다.
그런데 4년 후인 2017년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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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조혈모세포 기증 동의했다
이틀 전에 02에 같은번호로 자꾸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계속 무시하다가 그냥 받았다. 4년 전 일학년때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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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르는 사람끼리 일치하기가 0.01%의 확률이라는 조혈모세포라는데
그런 극악의 확률로 나와 일치하는 환자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환자는 정확한 신상을 알려줄 순 없지만 나와 같은 20대 여성이라고 했다.
같은 20대 여성이라는 사실만 듣고도 꼭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싸인할 때보다 네살은 더 먹었다고
이제는 바늘도 무섭지 않고, 3일 정도 누워있는 헌혈 같은 거였으니까.
”기증 할게요.“
그러니까 오히려 전화기 너머에서 당황하며
중간에 절대로 취소할 수 없으니 가족과 상의하고 오라고 해서
엄마에게 조혈모세포 기증 하고 오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충남대병원에서 2차 검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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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병원 유전자검사 하러 왔다
길을 몰라서 빨리왔는데넘빨리왔다ㅏ...심심 날씨도 구지고 ㅠㅠㅜ 오늘도내일도화이팅 암툰 인증 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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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채혈.
채혈이 어렵지 않았고 일치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20대 여성 환자. 언니일까 동생일까?
꼭 나아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동의서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렇지만 그 후로 소식이 오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고 나서야 전화가 한 통 걸려왔는데,
환자의 컨디션 문제로 기증받지 못할 상황이 되어서 종료되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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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혈모세포기증 동의하고 그 후
오년 전 캠퍼스에서 열렸던 조혈모세포 부스에서 별 생각 없이 신청했던 조혈모세포 기증맞는 사람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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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허무하고,
좋은 곳에서 행복하길 빌어주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꾸던 꿈을 접었고
취직해서 일 년 동안 인천에서 일을 하다가 다시 대전에 돌아왔다.
다시 대전으로 주소지를 옮기려는 오늘 나는 민증의 스티커를 보고 그때를 떠올린 것이다.
인생이 참 팍팍한것 같고, 모든 것이 성에 안 차서
답답하게 느껴지던 요즘.
어느새 나는 스물여섯 살이 되어있고 또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런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하다가 금방 끝나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그냥 하기나 해보는 것이다. 고민은 시작한 다음에 해도 괜찮아,
라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누구에게든지 묻고 싶다. 내가 잘 가고 있냐고.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위해 흔쾌히 동그라미를 그렸던 것처럼
누구든지 나에게 확실하고 예쁜 동그라미를 그려줬으면 좋겠다.
그럼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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